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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하면 홀짝홀짝이라는 술 마시러 가자는 뜻의 채팅용어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또한 타오바오1212 및 티몬 121212까지 1212라는 숫자를 통해서 많은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1212라는 숫자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날을 의미한다.
바로 1212사태를 의미하는데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1212사태라고 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배경과 결말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1979년 당시만 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통하여 국가재건 최고회의 2대 의장으로 대통령직에 있던 시기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비서실장은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을 하고 있었다.
당시 1979년은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령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전국이 어수선하던 시기였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는 최측근이었지만 서로의 노선과 생각이 많이 달랐다고 한다. 이미 드라마를 통해서도 수차례 방영된 5 공화국을 살펴보면 당시 차지철(경호실장)은 김재규(중앙 정보부장)를 상당히 무시했다고 한다.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도중에도 김재규와 차지철은 마찰을 빚게 되는데 당시 화를 참지 못한 김재규는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서도 발사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게 이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고 파헤치기 위하여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게 된다.
대통령이 사망한 만큼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게 되는데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고, 보안사령관이었던 투스타 전두환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된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기도 하였으며 군부 내에서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운영하여 군 선배들에게 좋지 못한 인식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든든하게 후원을 하게 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소장 간에는 사건의 수사 및 군 인사문제로 인하여 적지 않게 마찰이 일어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 당시 궁정동 안가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권력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당시 전두환이 중심이 되어있는 신군부세력은 군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며 사건 조사를 위해서 당시 계엄사령관이자 자신의 상사인 정승화 대장을 연행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긴다는 합동수사본부장이라고 해도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시 최규화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선조치 후 사후 승인을 받을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1212사태가 일어나던 12월 12일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은 육군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 공관 경비병들에게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을 강제연행에 성공한다.
총장이 대통령의 제가 없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당시 정상적인 육군본부의 지휘체계에 있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 육군 지휘부가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반란으로 생각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강제연행 후 법무부 장관을 통해 당시 최규화 대통령에게 사후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게 된다.
국방장관 및 당시 신군부 세력이던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 1 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이 함께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결국 정승화 체포의 사후 승인은 다음날 새벽 재가되었다.
그 이후 신군부 세력의 중심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 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당시 군에서 보안사령관을 맞고 있던 전두환 소장은 1980년 중장 진급과 함께 공석이던 중앙 정보부장 서리까지 되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움켜쥐는 중요한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그해 8월 대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고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이 된다.
이후 1981년 임기 7년의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총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통령으로 있게 된다.
1212 사태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정당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다시 재조사가 진행되었고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군부독재로 인하여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옥살이와 희생을 했던 만큼 1212사태를 바로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